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도(태종 이방원) (문단 편집) == 양녕과의 대립에 관하여 == 알아두어야 할 사실은 세자 양위를 둘러싼 양녕과의 대결이 애초에 '''충녕에게 가망이 없는 싸움'''이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전근대 사회는 능력보다 서열이 더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충녕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적장자의 권위를 이길 수 없었다. [[양녕대군(태종 이방원)|정상이었다면 말이다.]] 충녕은 능력이 좋으니 이 싸움은 식은 죽 먹기라 여길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양녕이 장자라고 충녕 앞에서 뻐기는 건 어리석어 보이지만 근거없는 자신감이 절대 아니었다. 장자의 권리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충녕은 양녕의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라는 조롱에 전혀 반박하지 못했다. 이 싸움이 가망없음을 보여주는 작중 요소를 들자면 먼저 '''태종은 어디까지나 기회만 제공한 것'''일 뿐이라는 것. 그마저도 자긴 정치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방관만 할테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충녕이 스스로 직접 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언젠가 신하들에게 누가 왕에 어울릴지 질문할 것이라는 말도 기한이 확실치 않다. 태종이 죽을 때까지 질문을 안 할 수도 있고[* 태종이 졸할 때까지 4년 정도 남은 상황이다. 충녕에게 남은 기한도 그 정도뿐이다. 물론 당시에 충녕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태종의 수명을 알 리는 없지만, 방우나 방의처럼 먼저 죽은 태종의 형제들의 연치만 생각해도 태종이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면 충녕이 아무리 노력한들 다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둘은 출발점이 전혀 다른 곳에 있으며, 사실 양녕은 ''''말썽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녕을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승자가 될 수만 있었다면, [[조비|왕위를 계승한 양녕]]은 [[조식(삼국지)|경쟁자로 행세하며 어그로를 끈 충녕을 해하려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충녕에게 가망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이 미래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장인 심온, 아내 소헌왕후, 어머니 원경왕후까지 충녕의 안위에만 우려를 표하는 건 다 이 때문이다. 충녕도 이를 알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는 말까지 하며 사지로 향하는 사람처럼 막대한 각오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양녕이 망나니가 아니었다면 충녕이 옥좌에 앉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양녕이 망나니라고 한들 ''''태종의 적장자''''라는 엄청난 메리트를 가지고 있으며, 만약 다른 두 아들도 별반 능력이 없었다면 무리없이 양녕대군이 다음 군왕이 되었을 것이다. 태종 본인이 태조가 적장자였던 이방과를 제치고 방석을 왕위에 세운것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니 태종은 자신은 적장자를 세자로 세워야할 책임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었고,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주는 태종이 양녕에게만큼은 정말 모두가 의아해 할 정도로 수 차례나 기회를 주고 무르게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다. 양녕대군은 일반 상식을 벗어날 만큼 구제불능이었고, 세종은 왕세자의 비행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신하들과 부왕인 태종 이방원에게 제대로 어필하고 후에 자신이 왕세자가 되는 것이 합당하다는 여론이 조정에서 형성되게끔 한 것은 충녕대군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